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포츠담 회담 (문단 편집) === 합의 사항 === * 일본 유럽에서의 전쟁은 5월 9일 [[나치 독일]]의 항복으로 종결되었지만, [[일본 제국]]은 패전이 분명한 상황이었음에도 1억 총옥쇄와 같은 허황된 구호를 부르짖으며 전쟁을 지속했고 이런 일본 제국에게 무조건 항복을 권유하는 [[포츠담 선언]]이 발표된다. 물론 눈치없는 일본 제국[* 정확히 말하면 눈치보다 이미 못 멈추는 폭주기관차에 일본 군부가 타고 있었다. 차라리 카이로 회담 이후로 조건부 항복 협상이라도 시도했다면 모르지만 그걸 무시한 이상 답이 없었다. 결국 항복 이후 체포된 [[도조 히데키]]는 감옥에서 자살시도까지 했으나 미국은 그를 기어코 살려내 교수대에 올려놓았다.]은 포츠담 선언을 한 큐에 거절했고 그 결과는 [[히로시마 나가사키 원폭 투하|인류 역사 최초의 핵무기 실전 투입]]이었다.[* 여담으로 트루먼은 회담 도중 스탈린에게 '''[[원자폭탄|강력한 신무기]]'''를 미국이 가지고 있다고 넌지시 알려주었는데, 이미 각종 스파이를 통하여 미국이 원폭을 개발한 사실을 알고 있었던 스탈린은 '그 무기를 일본에 적절하게 사용하기를 바랍니다.' 라고 적당히 받아쳤다.] 한편 일본 내부의 안정을 위해 연합국 내부에서도 천황제는 유지하기로 합의되어 있었으나 이를 일본에 알리진 않았다.[* [[히로히토]]에 대한 처벌이 논의되었지만 쇼와를 전범으로서 처벌하는 문제와 천황제 유지와는 별개였는데 천황 개인과 제도로서의 천황제를 구분할 필요가 있다. 사실 일본이 목맸던 것도 히로히토 개인이 아닌 유구한 역사의 천황제 전통이었다.][* 참고로 만약 천황제를 유지를 허용할 것임을 일본에 내비쳤다면 일본이 7월에 항복했을 개연성도 배제할 수는 없다. 패전이 명확한 상황에서 일본이 끝까지 강화 교섭에 목맸던 이유도 다름아닌 천황제의 유지였다. 일본에 있어 천황제 유지가 최우선 조건이었고 조선, 대만 등 식민지는 차선이었으며 만주국, 동남아, 중국 점령지는 최후 순위였다.] * 독일 / 오스트리아 독일 / 오스트리아는 네 개의 구역으로 나뉘어져 [[영국]], [[미국]], [[프랑스]], [[소련]]이 각각 한 구역씩을 통치하기로 결정된다.[* [[베를린]], [[빈(오스트리아)|빈]]은 한 나라의 수도라는 위상을 고려해서 따로 4등분된다.] 또한 [[오데르-나이세 선]]의 명확한 영역이 정해져서 결과적으로 독일은 [[동프로이센]], [[슐레지엔]] 등 동방 영토를 상실하고 이 영토는 폴란드와 소련에게 귀속된다.[* [[오데르-나이세 선]]으로 독일이 잃은 영토는 1937년(히틀러가 오스트리아, 체코슬로바키아를 합병하기 이전) 독일 영토의 25% 가량이었다. 이로써 독일은 양차대전의 결과 1914년 이전 [[독일 제국]] 영역의 1/3을 상실했다.] 전쟁 당시 피난 간 피난민을 포함하여 오데르-나이세 선 바깥에 살고 있던 800만 명의 독일인이 고향을 잃었고 그밖에 중동유럽 일대에 거주하던 700만 명의 독일인이 추가로 추방된 건 덤이다. 당연하지만 히틀러가 다른 나라에게서 강탈한 영토는 원상복귀가 이루어졌다. 전쟁 배상에 대해서도 논의가 이루어졌는데 독일은 대략 230억 달러 정도의 전쟁 배상금을 연합군에게 지불하는 것으로 합의가 이루어졌다. 이러한 배상금은 주로 산업시설과 기계류들을 뜯어가는 것으로 이루어졌으며[* 물론 강철의 대원수 스탈린은 돈되는 거라면 싹 다 털어가려고 했지만 [[베르사유 조약]]으로 지나치게 가혹하게 패전국을 대하면 어떤 결과를 초래하는지 충분히 인지하고 있던 [[윈스턴 처칠]]이 뜯어말렸다. 이 때 처칠이 스탈린에게 했던 말이 '말에게 채찍질을 하려면 적어도 말이 먹을 건초는 남겨둬야 하잖소'.] 소련의 점령 지역이 작센을 제외하면 상대적으로 산업화가 덜 이루어진 동부 지역이었기 때문에 서방 연합국은 자신의 몫으로 가져갈 산업 시설 중 10%를 소련에게 넘겨주었다. 또한 [[연합국]]은 독일의 전쟁 도발을 막기 위한 목적으로 독일에서 나치 세력 일소, 무장 해제[* 그러니까 아예 군대를 해체시키는 조치를 강구했다. 베르사유 조약에선 10만 명의 보유를 허용했지만, 이번에는 그것조차 용납하지 않겠다는 것이었다.], 민주화, 비중앙집권화 등을 실시하기로 결정한다. 이러한 맥락에서 [[뉘른베르크 재판]]이 열리는 것이 결정되었으며 탱크, 항공기 등을 생산해낼 수 있는 중공업 산업 시설들 역시 해체된다. 연합국은 아예 '독일의 경제력은 유럽 평균치를 넘지 못하게 한다.'라고 결정짓고 독일을 경공업, 농업 기반 국가로 만들려 했다. 물론 이런 조치는 [[냉전]]으로 인해 백지화된다.[* 독일 뿐 아니라 일본에 대한 조치 역시 이와 비슷했는데, 추축국이었던 이들에 대한 공업 대국화를 철저하게 막으려 했던 미국은 일본을 아시아의 스위스로 만들겠다 공언했다. 하지만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이는 몽땅 백지화되고 대신 산업시설이 마구 들어섰다. 다만 일본은 독일과 달리 미국에 의해 일방점령된 상황이라 소련의 입김은 철저히 배제되었다는 차이가 있다. 결국 미국에게 각을 세우며 독자적인 열강으로 남으려던 영국과 프랑스는 미국의 무역망에 편입된 서독과 일본에게 추월당했다.] * 그 외 서방 측은 스탈린에게 [[폴란드]]에 멋대로 공산당 정부를 세운 것에 거세게 항의했고 결과적으로 '폴란드에 임시정부를 세운 뒤 자유선거를 실시한다'는 결과를 얻을 수 있었다. 물론 이것은 스탈린의 기만에 불과했고 결과적으로 폴란드는 그대로 소련의 위성국가에 머무르게 된다. 물론 서방 연합국도 소련군 진주 상태에서 선거를 해봤자라는 걸 모르지는 않았으며 어디까지나 형식적 차원에서의 항의일 뿐이었다. 한편 이 임시정부 수립으로 런던에 존재했던 [[폴란드 망명 정부]]의 입지는 약화되었으며, [[폴란드 인민 공화국]]이 붕괴되고 폴란드 제3공화국이 수립되는 1990년까지 폴란드 망명 정부는 런던에서 계속 머무르며 자신들의 정통성을 주장하게 된다.[* 냉전의 종식 이후 수립된 현재 폴란드의 헌정체제(즉, 폴란드 제3공화국)는 자신들이 폴란드 망명 정부의 정통성을 계승했다고 규정하며, 냉전 시대 폴란드 인민 공화국을 소련의 괴뢰국이자 비정통 국가로 분류한다. 폴란드 망명 정부가 1990년 자발적으로 해체한 것도 폴란드 제3공화국이 수립되었기 때문이다.] 그래도 ~~폴란드 망명 정부를 팽한 것이 미안했던지~~ 영국 측에서 노력을 한 끝에 폴란드 망명 정부 산하 [[자유 폴란드군]]은 어떠한 불이익도 없이 고국으로 귀국하는 것이 허락됐다...는 것은 표면상이고, 실제로 이들은 '''서방 제국주의의 스파이'''라는 사자 풀 뜯어먹는 소리를 듣으며 박해받았다. 소수는 처형되었고, 거의 대부분은 변변찮은 일자리를 전전해야 했다. 폴란드의 권력은 결국 친소파가 쥐었고, 영국 망명파건 국내에서 반독 게릴라전을 했건 다 숙청당했다. 덧붙여서 [[인도차이나]] 일대에서도 전후 질서가 계획되는데, [[베트남]]의 분리가 최초로 결정된 것도 이 때의 일이다. 북위 16도를 기준으로 이북은 [[장제스]]의 [[국민혁명군|국민정부군]]이 진주하기로 결정됐으며, 이남은 영국군이 진주해 일본군의 항복과 무장해제를 담당하기로 결정됐던 것. 하지만 전쟁 직후 제 코가 석자라 베트남까지 신경 쓸 여유가 없었던 중국과 영국은 일찍이 동남아에서 세력을 구축했던 프랑스에게 이 지역을 맡겼고, 점령군으로 다시 들어온 프랑스가 베트남의 독립 운동을 무력으로 찍어누르면서 베트남은 30년 가까이 전쟁으로 아수라장이 되고 만다.[* 월남전 탓에 잘 알려진 남베트남, 북베트남이 세워지게 된 것은 1954년 [[디엔비엔푸 전투]]에서 프랑스가 참패한 이후 미국이 이 일대에 개입하면서 부터였다. 포츠담 회담과는 별개의 일.]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